1938년 11월,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에 1차로 지원했다.
처음엔 나이 제한으로 거절당했지만, 동료 유증선 선생의 권유로 탈락을 재고시키기 위해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에 피를 내
'견마지로 혈서'를 학생시험 용지에 써서 보낸다.(동료 선생 유증선의 증언)
이 혈서는 1939년 3월 만주신문에 게재되었고, 이후
고향 선배이자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선인 출신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가
신문을 보고 후원자가 되었다.
이러한 도움을 얻은 박정희는 1939년 10월 드디어 군관 선발 시험을 보았으며,
결국에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에, 합격자 240명 중 15등으로 입학하였다.
이때가 1940년으로 박정희의 나이는 23세였다.
입학생 대다수는 17~19세였으니 나이 차가 꽤 있었던 셈이다.
자랑스러운 친일파 다까끼마사오의 후손
국짐당의 전신을 보시겠습니다.
말타는 복장은 일본군복 복장(비슷은 하나)이 아니라 그 당시 승마복장이라 하는 설도 있습니다.
하나의 꼬투리로 전체를 이야기 하는 2찍들이 있어 걸고 넘어가봅니다.
프랑스는 전쟁후에 모조리 처형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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