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우익 편가르기
일제 강점기 마지막 시기에 좌익에 비해 친일활동이 많을 수 밖에 없었던 우익에 친일이라는 딱지는 원죄와도 같은 것이었다.
해방직후 민심은 우익에 비해 좌익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이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기 보다는 민족해방운동에 좀더 충실했던 세력이었으며 자주독립의 옹호자였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1946년 1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따른 신탁통치 논쟁을 계기로
친일파를 포함한 우익은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로 전개되어온 식민지 시기이래의 정치적지형을
좌익 대 우익의 대립으로 바꿔놓는데 성공했고, 좌익을 매국노로 몰면서 우익은 친일의 딱지를 덮고,
좌익대 우익의 대결구도를 이루면서 위기를 탈출했다.
그 후, 오랜 기간에 이 땅의 민주개혁 인사들, 아니 민주나 개혁을 들먹일 필요 없이
극우파가 서 있는 지점보다 조금이라도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렸다.
<한홍구 대한민국사 1권 발췌>
지금 여기서 극우에 서지 않는 여러분들은 자의반, 타의반 좌익의 대열에 서있는 겁니다.
극우 줄세우기에 광분하는 자한당과, 친일세습세력을
분쇄하지 않는 한, 한국사회의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민주주의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좌우없음
한국인과
친일매국노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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