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은 만고의 진리이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신당전쟁에서 승리하고, 당과 평화적 관계를 맺은 후 화랑도는 왕에게 눈엣가시가 되었다. 화랑의 대장은 진골 출신이다. 성골은 아니지만, 힘으로 왕이 된다고 하면 백성들이 정통성이 없다고 부인하기는 어려운 신분의 사람들이다. 진골도 왕족이었기 때문이다. 화랑도라는 전우애로 뭉친 전사집단이 전쟁 시에는 보물이었지만, 평화가 찾아 오자 왕실에게는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681년 김흠돌의 반란(?)을 계기로 왕실은 관련되지도 않은 모든 화랑도들도 차근차근 숙청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흠돌은 자기 딸의 아들이 태자가 되게 하려 한 것이지 자기가 왕이 되려 한 것이 아니므로 엄밀히 모반이라 하기도 어렵다. 화랑도 숙청 과정에서 죽지랑도 힘을 잃었고, 죽지랑의 부하였던 9등급 벼슬인 득오도 6등급 벼슬인 익선의 모사(?史, 사적인 부하)가 되어 익선 개인이 부과하는 노역(강제 복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죽지랑은 득오도 늙었으므로 강제복무하다가 죽을 것을 염려하여 득오를 빼오려고 익선에게 갔는데 익선은 재물을 아주 많이 받고서야 (죽지랑이 딱하여 이 소식을 안 다른 관료들이 재물을 익선에게 준 것임) 득오에게 휴가를 허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실은 익선을 죽이려 하였는데, 익선이 도망 가자 모량리 전체의 벼슬을 막아버렸다.
익선의 행동은 신라의 법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모사는 익선이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도가 지나쳤다. 당시 신라인들에게는 김유신과 함께 대업을 완수한 죽지 장군도 영웅이었다. 왕실도 죽지 장군에게는 아무 죄가 없지만, 왕실의 안위를 위해서 죽지 장군을 숙청한 것을 알고 있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노년의 죽지랑이 겨우 6등급에 불과한 익선에게 몸소 찾아와서 득오의 휴가를 부탁했음에도 익선은 죽지랑이 끈 떨어진 연이라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했던 것이다.
모죽지랑가는 이러한 배경과 ?史제도를 알지 못하면 해독할 수 없다. 기존의 견해는 ?史를 모습이라 착각하여 나름대로 앞뒤가 연결되지도 않는 각자의 소설을 창작하고 있다. 일인 소창진평과 이오십보 소백보이면서 지들끼리 천재니 위대한 업적이니 하면서 웃기고 있다.
모죽지랑가 해독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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